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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그 굴욕의 역사현장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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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그 굴욕의 역사현장을 가다
  • 이재준 기자
  • 승인 2020.07.21 0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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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1636년)시 인조 왕이 서울 도성에서 남한산성으로 피난 온지 40일 동안 포유되어 먹을게 없어 고립되어 청나라 군에 의해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굴욕을 당했던 역사를 스스로 기록하여 세운 삼전도 비 산성을 찾았다.

 

1637(인조17)년 1월 30일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치욕의 날이며 조선역대 임금중 가장 슬픈 임금,인조왕이 굴욕적인 항복을 한 남한산성이다. 청태종이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한지 불과 일주도 안돼서, 한양 궁궐을 버리고 이곳 남한산성으로 피난한 인조왕은 청태종이 지금의 송파구 삼전동 허허벌판에 진을 치고 남한산성을 포위한지 40일 만에 굴욕적인 조약을 맺고 추운 겨울에 쌀도 물도 없이 항거하다'치욕적인 항복을 할 수밖에 없었던 그때를 되새겨 본다.

천주교 박해가 있었던 남한산성 성지를 찾아

 

주말이면 형형색색 등산객들과 관광객들이 몰리는 곳이 기도하다.
주변에는 커피숍 갖가지 음식점과 노래방등이 즐비하게 늘어져 과거의 아픈 사연은 어디로 가고 먹자판 거리로 변해버린 역사의 현장이 아픔을 말해주고 있다.

먹자골목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개울가 나지막한 산기슭에 천주교 성지가 눈에 뜨인다.

"영혼이 쉬는 곳, 천주교성지 "잠시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이곳 남한산성은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 광주일대에서 체포된 수많은 신자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모진 형벌을 받으면서 배교를 강요당했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세속의 부귀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육신의 고통을 참아낸 곳이다.

남한산성은 삼국시대 이래로 지리상 중요한 요충지였으며, 조선 중기인 1577년(선조10)에 광주부가 설치되었고 1623년(인조1)이후 유수부로 승격, 유수의 치소가 이전되면서 남한산성은 천주교 박해와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었고 박해 때마다 천주교 신자들이 각지에서 이곳으로 끌려와 순교함으로써 잊을 수없는 "순교 터"가되었다.

형별로는 칼로 목을 베는 참수와 목을 배어 죽이는 교수 매로 때려 장살 등이 있고, 특히 병인박해 때는 너무 많은 신자들이 잡혀오자 형을 집행하는 포졸이나 군사들이 새로운 사형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 백지사이다.

▲ 선명한 붉은 피자국

 

이것은 사지를 묶고 얼굴에 물을 뿌린뒤에 한지를 덮는 일을 거듭하여 숨이 막혀 죽도록 하는 방법이 있는데, 그 고통이 얼마나 컸겠는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남한산성은 이와 같은 고통 속에도 진리를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마친 신앙 선조들이 넋과 진토가 스며있는 곳이다. 고귀한 순교정신을 후손들에게 신앙심을 심어준 너무나 가슴이 아픈 곳이다.

당시, 박해의 원인을 살펴보면, 사상적으로 유교사상(충, 신분중시)과 그리스도교 평등사상의 충돌로 이어지고 사회적으로 조선의 전통적인 예절인 조상의 제사(효)를 거부했다는 것을 꼽을 수 있고,정치적으로 당파 싸움의 방편과 서양 세력의 진출에 대한 거부감 등을 들 수 있다.

이후의 4대 박해를 들여다보면 1801년의 신유박해, 순조, 노론, 벽파에 의한 대대적 정치적 박해 정약종, 이승훈, 주문모 순교, 정약용, 정약전 유배와 1839년의 기해박해,헌종, 샤스탕, 앙베르, 모오방 프랑스 선교사 순교했다.1846년의 병오 박해 때는 헌종,김대건 신부가 순교했다. 1866년의 병인박해, 고종, 최대 규모의 박해 9명의 프랑스 선교사와 8000여명 순교했고 병인양요의 원인으로 알려졌다.
특히 병인박해로 순교한 천주교 신자는 대략 1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그 중 대부분이 무명 순교자이고 이름을 알 수 있는 순교자 중에서 24명만이 시성됐다. 1866년 베르뇌 주교 등이 3월 새남터에서 순교하며 시작된 박해는 서울뿐만이 아니라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후 병인양요로 인해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 가열됐다. 이 시기에 순교한 신자 수는 모든 기록을 종합해 볼 때, 대략 1만명 내외로 추산된다. 여기 남한산성 성지입구에 놓여있는 신기한 사진 한 장이 당시의 처참함을 말해주고 있다.

▲ 기이한1장의 사진은 이해할 수 없는 빛이 나있는 신기한 현상.

 

지난주 기자가 이상한 원통형 바위가 있어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그 원통형 바위는 지름1m가량의 크기에 수박 크기만 한 내부구멍이 나있었다. 참수의 한 방법으로 머리를 넣고 황소에 밧줄로 묶어 목을 매달아 참수 했다'고한다. 당시의 처참함을 말해주듯 구멍 상단에는 신기하게도 수백년이 지난 지금도 붉은 핏물이 가시지 않고 묻어있다. 얼마나 많은 고통으로 죽어갔을까 얼마나 한이 맺혀있으면 이도록 많은 세월이 흘러갔는데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을까. 마음마저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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