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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기 감독 "내 마지막 꿈은 영화 100년사 완성하는 것"
현정석 기자 | 승인 2019.05.04 13:03

[이코노믹매거진= 현정석 기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0년이다. 또한 한국 영화를 제작한 지도 100년이 됐다. 일제 강점기였던 1919년 ‘의리적 구투(仇鬪)’가 그 시작이다. 1923년 나운규 감독의 ‘아리랑’을 시작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최초로 필름을 만든 1919년으로 영화인들이 모여 결론 내렸다.

그 이후 100년 동안 한국영화는 7000여 편을 제작했다. 그동안 우리는 무엇을 남겼으며 무엇을 계승하고 무엇을 버려야 할지 재정립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런 고민은 영화생활 60년인 이석기 감독의 한국영화 100년史 5부작 다큐멘터리 영화로 조명되고 있다.

이 감독은 1960년에 영화계 첫발 들인 후 180여 편을 촬영·제작하고 대종상을 4차례 수상한 최고의 감독이다. 이 감독과 만나 한국영화 100년을 물어보았다.<편집자 주>

감독 조수가 사준 자장면이 맛있어 시작한 촬영 아르바이트가 인연

이석기 감독은 1960년 촬영기사로 영화계에 입문했다. 정일성 촬영감독보다 후배지만 감독들은 양대 산맥으로 뽑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일반에 알려지지 않은 최고 전문가다.

그의 영화 시작은 가난에서 시작됐다고도 볼 수 있다. 고등학생 때 부산에 살다 서울로 이사왔는데 왕십리에서 용산까지 한 시간 반을 걸어다녔다. 도시락은 생각도 못했다. 점심 시간에 도시락을 먹지 못하니 배고픔 반 부끄러움 반으로 운동장에 있다가 수업에 들어간 적도 많았다. 3일을 굶은 적도 있었다.

이 감독은 연세대학교 화학과에 입학했지만 학비가 없어 결국 포기했다. 그 때쯤 작은 아버지(이병삼 촬영감독)에게 심부름을 갔는데 촬영 현장에 일손이 부족해 잠시 일을 도와줬다. 그 때 작은 아버지 조수로 일하던 사람이 짜장면을 사주면서 ‘계속 나와서 일해달라’는 말에 여길 가면 짜장면을 또 먹을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에 다음 날 또 갔다. 그 분은 내게 곰보빵도 사줬다. 그 조수는 나중에 국립영화제작소에서 일했던 고 안면희 촬영감독이다.

촬영기사 보조로 들어가자 영화현장에서 밤을 지새우다시피 했다. 말단 제3조수로 30kg이 넘는 카메라 배터리를 들고 다녔다. 당시에는 자동차 배터리를 카메라용으로 썼는데 매우 무거웠다. 제2조수는 카메라, 제1조수는 노출계 하나만 들고 다녔다. 제일 대장이 촬영기사인데 지금의 촬영감독이다. 삼촌이 대장이었지만 위계질서가 엄격해 조카라고 봐주질 않았다.

그래도 영화가 즐거웠던 데다 먹고 자는 문제가 해결되자 보름을 잠을 못자도 행복하게 일했다. 그런 이감독을 좋게 본 감독들은 촬영감독으로 남들보다 빨리 올려줬다. 촬영현장에서 먹고 자고 남들보다 노력을 더하니 대우가 달랐던 것이다. 보통 7년 이상을 일해야만 촬영감독으로 승격이 됐는데 이 감독은 5년만인 1966년 노진섭 감독의 <보경 아가씨>로 데뷔했다.

그다음 영화가 정인엽 감독의 <명동 왈가닥>이었다. 허장강, 엄앵란 등이 출연했던 영화다. 그 당시 이만희 감독이 삼촌인 이병삼 촬영감독과 <군번 없는 용사>를 찍고 있었는데 제가 촬영을 지원하게 됐다. 북한군 트럭들이 줄지어 들어오다가 한국군의 습격을 받고 불타는 장면을 찍고 있었는데 갑자기 트럭 기사들이 달려들어 불을 끄려고 하자 촬영현장은 발칵 뒤집혔다. 그 사람들이 화면에 들어가면 안 되기 때문에 그때 이 감독은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그 사람들이 안 나오게끔 앞으로 달려가 찍었다. 공식적인 기록은 없지만 한국 최초의 핸드 헬드 촬영이었을 것이다.

전투기에 직접 타고 영화를 찍으며 고막까지 다쳐 … 멋진 영상으로 대종상 수상까지

그 때 이만희 감독의 눈에 들어 1968년 신성일 남정임 황정순이 출연한 <창공에 산다>를 찍게 됐다. 그는 대본을 받자마자 ‘제대로 만들어보자’는 각오가 생겼다. 촬영하면서 F5 전투기를 직접 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훈련받지 않은 일반인이 전투기로 몇 시간을 비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당시 중학교 선배가 공중곡예팀인 공군 블랙이글팀에 있었는데 그에게 도움을 받았다. 며칠 동안 촬영하면서 20시간 이상을 탔다. 체력이 급격히 저하됐지만 촬영을 강행했다. 결국 고막이 터지고 중이염이 생겨 촬영 기간 내내 귀에서 고름이 나올 정도였다. 그 때 후유증으로 귀가 좀 안 좋은 편이다. 그러나 그 열정은 이 감독에게 그 해 대종상 촬영상을 안겨줬다.

항상 멋진 영화 장면 생각에 대학 노트로 10여권 스크랩해

이 감독은 외국 잡지나 영화를 보고 많이 생각하고 그림 공부도 별도로 했다. 외국 카메라 잡지를 보면서 괜찮은 그림은 스크랩을 하기 시작했다. 인물, 풍경으로 분류해 만든 대학 노트가 10여 권에 달했다. 처음에는 감독들이 얘기를 듣고 ‘아 그래? 해봐’ 그랬었지만 나중에 이런 노트를 보여주며 이런 장면이 어떻겠느냐고 상의를 하기도 했다. 영화 현장에서도 감독들이 의견을 들어주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영화를 100여 편 이상 찍게 됐다. 1991년에는 한국 영화 최초로 미국 현지 올로케 영화를 찍었다. 비용이 많이 든다고 다들 말렸지만 화면에 대한 욕심에 손창민, 이혜숙, 유동근, 박찬환 등과 다수의 외국인들도 출연시켜 찍었다. 예상대로 배경이 이국적이다 보니 인기를 끌게 됐다. 이 영화의 원작자는 김한길인데 다른 감독에게 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돌아온 작품이다.

40년간 현장 뛰어 … 영화 발전 위해 노력 … “100주년 다큐멘터리 완성이 마지막 꿈”

이 감독은 이후에도 활발한 활동을 해왔다. 2006년도까지도 현장을 뛰었다. 이후에 한국영화촬영감독협회장, 한국영화인협회 부이사장, 사단법인 미래영상테크 위원회 이사장 등을 하며 한국영화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다수의 대종상 외에도 올림픽 문화훈장을 서훈받기도 했다.

이 감독은 “내게 남은 꿈은 단 하나다. 100주년 다큐멘터리를 완성하는 것. 더 이상의 욕심은 없다. 아쉬운 것은 자비로 제작하다보니 인터뷰를 했어야 하는데 못 하고 그 사이 돌아가신 분들이 10여 분 된다. 꼭 이 다큐멘터리를 완성해 하나의 이정표를 세우고 싶다.”

기사입력 2019.05.04 14:20:54

현정석 기자  gsk126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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